역사란 무엇인가? 기록하는 이에 의해 기록된 지나간 시대의 기억이다. 기록하는 이. 그리고 지나간 시대의 기억. 따라서 역사는 그 특성상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도 기록되어 기억되지 않는다면 역사가 아니고, 왜곡된 사실일지라도 진실로 기록되어 기억되면 역사이다. 역사가란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사료들로 그 사건을 재구성하는데, 이 과정에서 같은 사실이 다양하게 해석, 이해 된다. 이러한 사실 속에서 대중은 (말그대로) 진실된 사실의 역사보다는 진실이라고 많은 이들에 의해 해석,기억되는 역사를 진실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다. 같은 사건도 사람들마다 서로 정반대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대중은 진정한 진실을 아는것은 불가능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역사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소설에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는 시점이 있다. 이는 작가가 모든 상황을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이해하며 서술 하는 기법으로서 독자는 그 특성상 등장인물의 생각과 모든 주변 상황을 읽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때문에 때론 독자가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답답해 하는 경우가 있다.
'아 이런 답답한 놈아. 그녀가 너를 버린건 그녀가 죽을 병에 걸려서 그런건데 네가 오해를 하면 어떡하냐.'
소설 속 등장인물이 신이 아닌 이상 이러한 상황을 알턱이 없다.
지금 역사를 보는 우리의 시각은 마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시각과도 같다. 사건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우리로서는 모든 정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정황에 다가가는 역사기술에 의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 등장인물들처럼 신이 우리를 봤을 때 답답해 할지도 모른다.
'아 이런 답답한 인간들아. 진실은 그게 아니잖아.'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포기하고 진실로 알려진 것을 진실인냥 믿고 살아야 할까? 어떠한 방법이나 우리가 갖추어야 할 자세가 없을까?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작가가 될 수 없다면, 그러한 시점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통해 그 시점에 수렴하면 된다. 말이 어렵다고? 예를 들어 어떠한 사건이 과거에 일어났다고 치자. 이 사건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일어났을 것이며, 그 주변 환경, 과거 상황, 현재 관계, 그로 인한 미래의 영향까지 모두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가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모여 보편적인 역사로 서술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공부는 이것만 공부하면 끝이었다. 이것이 사실일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다른 노력을 추가로 해야한다. 즉 보편적 역사기술만 공부할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역사적 해설(비주류 학자에 의한 전혀 다른 관점의 역사, 기득권의 관점에서 본 역사, 피지배층의 관점에서 본 역사 등) 또한 풍부하게 공부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통찰하는 신의 눈을 가질 순 없어도 수많은 눈을 통해 그것에 다가갈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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