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죽음>
근대라는 시기에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인류의 해방'이라는 서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오늘날 진정한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이 오리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근대라는 시대에 독일의 관념철학은 '정신의 실현' 이라는 서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정신적 수준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어떤 면에서 활자매체로부터 멀어지는 이 시대에 사회의 교양수준은 책을 읽던 시대보다 후퇴한 느낌이다.
좌익들은 '프롤레탈리아의 혁명'의 서사를 만들어냈으나, 아무리 늦어도 80년대 후반 이후 그 거창한 서사는 세계사의 악몽으로 드러났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적 서사가 승리한 것도 아니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버전이든 신자유주의적 버전이든 자본주의의 서사 역시 이미 80년대에 위기에 처했다. 자본주의의 서사는 '모두가 더 부유해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세계 어느 곳에서나 모두가 다 부유해지리라는 믿음은 사라지고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자신을 어떻게 정당화할지 모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정당성의 위기를 자본주의는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가? 리오타르에 따르면 오늘날 자본주의는 "언어를 착취한다." 즉 매체와 정보기술을 이용해 문장들의 유통을 통제함으로써 자본주의는 굳이 체제로서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고도 그럭저럭 이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진코드의 세계>
언어 착취란 무엇인가? 매체와 정보기술은 오직 제 언어로 번역 가능한 문장들, 즉 전자 데이터 프로세싱에 적합한 문장들만을 허용한다. 그리하여 지식인들이 미디어에서 그와 다른 방식으로 말하려할 경우, 곧바로 대중으로부터 '난해하고 복잡하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프랑스의 꽤 전위적인 편집자가 어느 유명한 신문사에 왜 자기 책을 소개 안 해주냐고 항의를 했다가 결국 이런 답변을 받았다.
"소통 가능한 책들을 보내주시오."
리오타르에 따르면 과학이나 철학이나 예술의 문장은 전자 테이터 프로세싱과는 애초에 호환성이 없다. 왜냐하면 데이터 프로세싱은 근본적으로 예스-노 라는 대수의 이진논리(binary logic)에 따라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언어의 시장은 곧 미디어의 시장이 되었다. 그 시장에서 순환되려면 문장들은 무엇보다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과학이나 철학이나 예술은 단순한 이진논리의 시장에선 당연히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뭔가 전달하는 것(정보)을 담지 못한 문장들은 시장에서 도태된다. 문제는 과연 언어가 그저 도구, 극것도 소통의 매체에 불과한가 하는 것이다.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하는 작업의 바탕에는 언어가 한갓 도구가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들은 언어 자체가 자율적이며, 그 자율적 실체의 비밀을 밝혀내는 게 자신들의 과제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시장에서 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보'다.
- 진중권 (생각의 지도) 中
무언가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지식인들의 꽃인 대학은 취직에 필요한 '실질적 정보'만을 상품화하여 전시, 판매하고 있으며 구매자인 대학생들은 판매자들의 실적에 따라 대학을 고르는 실정이다.
'소통'이 대세인 시대 또한 대세하였다.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들도 '소통'을 강조하고 있고, 어디서든 '소통'을 안하면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고 역설하고있다. 물론 '소통' , 중요하다. 하지만 때론 , 특히 언어(글)이란 매체에 있어서 '불통'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로인해 독자는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추가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이를통해 새로운 이해의 경지를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소통이 쉽게 가능한 이진논리의 세상에 산다는 것은 남들이 닦아준 대로만을 뛰어 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쫙 뻗은 길이 아닌 산길이나 험한 길 때론 좁고 더러운 길은 아예 처다보지도, 가려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건 알아두어야 한다. 언제나 새로운 것은 험한 길 뒤에 있고 험한 길을 개척한 사람이 결국 이 시대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험한 길을 가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이진코드를 벗어나는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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