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6일 수요일

모모

나에게 정신적 휴식을 주고자 책장에 묻혀있던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다시 읽었다. 동화이지만 동화같지만은 않은, 현대인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였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모모'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잘 들어주는 소녀가 현대인들의 시간을 빼앗는 '시간도둑'들에 맞서 다시 사람들의 시간을 찾아준다는 전형적인 모험물이다. 하지만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했던것은 비단 '모모'의 모험이 아닌 바쁜시간 속에서 서로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였다. 시간을 빼앗기기 전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은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사람들과 다정하게 지낸다. 아이들은 모여서 무한상상의 나래 속에 지루할 틈 없이 신나게 논다. 하지만 시간도둑들의 횡포로 인해 아이들은 탁아소로 맡겨지고 어른들은 짧게만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하루를 쉴틈없이 보낸다. 모든것이 빠른 그러한 사회에서 살게된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의 초등학교5학년때가 떠올랐다. 절대 잊지못할 시간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그 때 학교 담임선생님은 소위말하는 '말년 행정보급관'같은 분이었다. 학교에서 정교사 중 최고로 나이가 많으셨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건 나가서 노는것, 수학, 토요일 컴퓨터실 풀타임이 전부였다. 공부는 시험 잘 볼 사람만 하고, 방학숙제는 상 탈 사람만 하라던 선생님. 매일 4시간 이상씩 축구를 했고, 전학생이 오니 기념으로 하루 종일 나가서 놀았다. 우리에게 시간표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학부모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당장이라도 학교로 뛰어올 판이지만 그당시 우리 학부모님들은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셨다. 그당시 우리는 아무 걱정 없이 학교를 소위 놀러 다녔다. 미술시간엔 밖에 나가서 그리고, 무언가 만드는 시간도 밖에 나갔다. 무언가 만들다가 만드는거 접고 병정놀이 따위를 하던 그 때의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초딩이었다.
지금의 초등학생들은 어떠한가.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가기 바쁘고, 노는 것은 미래를 위한 시간투자에 반하는 금지되어야 할 것이 되었다. 모국어인 한글을 정확히 사용하기 전에 영어를 배우며,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도 같이 놀 아이들이 없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 쳇바퀴 속 햄스터처럼 살아간다. 창의는 죽었고, 암기만이 남았다. 상상 속 세상이 죽었고, 현실 속 매서운 칼바람만이 남았다. 이러한 아이들이 자란 미래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상상이 죽은 현실은 매마른 이성만 남기고, 그러한 사회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것이 진실된 세상인냥 살아갈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나도 모른다. 진실이란 원래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진실이니까.

자신의 삭막한 현실 앞에 지쳤다면 '모모'를 읽어보라.

학습의 노동화

초등학생이 고교 수학… '학습노동'에 지쳐 문제아 되기도

영어 사교육 시작 연령도 점점 낮아져 현재 3.7세
더 못 따라가면 자포자기 우등생 망치는 경우 많아
 
 
누가 한말인지는 기억 안나는데, '삶에서 가장 큰 축복은 일찍 죽는 것이고, 그보다 더 큰축복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런 기사를 읽을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댓글을 보면 다들 삶이 불행하다고만 이야기 한다. 언론에서 뿜어내는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삶에 행복이 없다. 적어도 호주에서는 이런 느낌 안받았는데, 한국에 오고 몇달동안 느끼는 감정은 한국은 현대화의 전형적인 모습-불행한 삶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이 삶의 축복이 아닌 삶의 저주가 되어버린다면,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남들은 말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답게 살 수 없다고. 먹고 살기 힘들다고.
나는 묻고 싶다. 그렇게까지 돈 많이 벌면서 살면 사람답게 사는 것이냐고. 무엇이 사람다운 것이냐고. 하루에 빵 한조각을 먹으며 가난하게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러고 싶다. 행복이 비교로부터 나온다는 현대인의 사고 때문에 그들은 마치 가난이 불행의 척도인줄 알고 있다. 배부른 돼지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왜 배부른 연예인들은 자살을 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는가. 그것이 사람다운 것이라면 왜 남들의 시선을 받고 즐기는 그들은 죽는가. 행복하지 않아 죽음을 찾는 것이라면 죽음이 행복의 극이기 때문인가.
현대화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면
현대화를 버리는게 낫다.

어른들은 반성해야 한다. 무엇이 진정 이 사회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이게 다 너희의 미래를 위해서야.'라고말하는 부모들은 그 '미래'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돈'많은 미래인가.'행복'한 미래인가.

자본주의의 이러한 모습때문에 마르크스는 그러한 극단적인 공산주의를 추구 했을지도 모른다. 공산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사회에 '자유'가 없다고 외치지만, 과연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자유'는 있는가?
'자유로운 상상이 제한된' 수학의 정석을 푸는 초등학생은 영재이며, '상상의 날개를 펼친'1+1=2가 왜 공리인지 고민하는 학생은 둔재인 사회가 진정한 '자유'로운 사회인가?

학습노동이라니. 그냥 한국사회 자체가 코메디이다.
 

제목없음2

매우 빨리 달리는 자동차가 있다. 이 자동차 운전자는 트랙을 한바퀴 돌 때마다 밖으로 사탕을 던진다. 그는 너무 빨리 달리기 때문에 누가 사탕을 받는지는 알수가 없다. 다만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밖으로 던지는 사탕은 많아진다.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탕을 받기 위해 바구니를 들고 서있다. 모두 공평하게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보면 무언가 다르다. 누구는 구멍이 뚫린 작은 바구니를 들었지만 누구는 매우 큰 진공기계가 달린 바구니를 들었다. 누가 사탕을 갖게 되는지는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운전자는 오직 빠르게 달려서 많은 사탕을 뿌리면 모두 좋아하겠지라는 일념하에 가속페달을 더욱 힘차게 밟는다.